문태준 시인
입력 2025.11.30. 23:38
보라의 저쪽
고요를 볼 때가 있다
빛을 머금고 피어나는 꽃속
작고 동그란 새벽
감은 두 눈 가득 보이는 바다
오전 열한시의 창문 너머
가만히 돌아선
길모퉁이
아무도 없는데 달려오고 있는
그림 속에 들어있는 고흐의 화병
노란 벽
붓 텃치
태풍이 지나간 저녁
땅거미 지는 거미줄로 뚝뚝 떨어지는 허공
어느 집에서인가 밥 짓는 소리
정지해있는 듯 어른거리는
그곳에 고요가 들어있다
국화꽃 그늘 향기 같은 것
이 세상을 떠난 당신이 머물고 있는
파랗게 휘어진
영혼 저쪽
-권대웅(1962~)

시인은 일상에서 발견한 고요의 목록을 제시한다. 꽃 안쪽에 담긴 새벽의 빛, 가만히 감은 눈, 격랑이 잠든 바다와 길고 긴 해안선, 구부러져 꺾여 돌아가는 길, 아무도 없지만 금방이라도 누군가 뛰어올 것만 같은 골목길, 꽃을 꽂은 병을 그린 그림, 온기가 느껴지는 벽, 붓놀림이 마른 흔적, 태풍이 지나가고 다시 맞은 평온한 저녁 등등.
심지어 현상과 활동이 있더라도 어떤 움직임은 그것의 배경인 고요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가령 나뭇잎이 빙그르르 돌면서 떨어지거나 흰 눈송이가 아주 느리게 내릴 때 우리는 그곳 허공에 오래 거주해 있던 고요를 본다.
그렇게 우리는 일상에서 고요를 마주한다. 오전의 볕이 물렁한 소파에 앉을 때, 물 떨어지는 소리가 똑똑 들려올 때, 근심이 풀렸을 때, 새가 간간이 울고 그 여음이 물결처럼 올 때 우리는 고요를 직접 본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11/30/SYGDRAC6LBHMZMTUYRTX6JUI4Q/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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