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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팀 알퍼의 한국 일기] 은퇴는 몇 살 때?… 영국도 한국도 이젠 그런 개념은 없다

팀 알퍼 칼럼니스트

입력 2019.06.11 03:11


65세 되면 편해질까? 유럽이나 아시아나 그건 옛말
한국 노인들, 세계서 제일 바빠영국 수퍼엔 온통 백발의 70
'은퇴'는 이제 60·70대에 금기어'노년'이란 개념 이제 존재 안 해


삶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이십대에는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 결혼을 해서 어디엔가 정착하는 것을 꿈꾼다. 삼십대가 돼 바라던 것들을 이루고 나면, 사십대가 되는 순간 정박했던 닻을 다시 걷어 올리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직장에서 탈출하고 한때 간절히 소망했던 자식들을 어서 빨리 출가시킬 수 있기를 고대하게 된다.

65세. 사막을 헤매는 것 같은 40대를 보내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황금 티켓처럼 들린다. 언젠가 65세가 되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던 무거운 책임감으로부터 해방돼 대출, 각종 고지서로부터 자유롭던 시절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65세가 되는 순간 모든 것이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유감스럽지만 아니다. 모든 것이 더 이상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때는 연금으로 살아가는 것이 충분했지만, 이제는 아시아나 유럽이나 마찬가지로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의 어르신들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한다. 그들보다 더 바쁜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내 이웃에는 멀리 울산에 살고 있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쌍둥이 손주를 돌보기 위해 주중에는 서울에, 그리고 주말에는 울산으로 내려가 남편이 먹을 일주일치 반찬을 만들어 놓고 교회 각종 행사에 참가한 후 일요일 저녁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할머니가 계시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대개 은퇴 연령이 지난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우리 아파트에서 경비를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 한 분은 마주칠 때마다 공무원으로 일하셨던 과거 이야기로 나를 즐겁게 해주신다. 영국의 경제나 최근 브렉시트 전개 상황을 나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의 지성은 면도날만큼이나 예리하다.



한국에는 왕성하게 노동을 하고 있는 노년층이 많다. 인생의 마지막 장을 엄마만큼이나 각별한 애정으로 손자들을 돌보고, 어깨가 무거운 젊은 아빠만큼이나 일터에서 부지런하게 일하는 활동적인 노년층으로 가득하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이 근면 성실함으로 현재 이 나라가 누리는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세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무언가를 계속해야 하는 반복되는 일상을 제외하고는 다른 삶의 방식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생산성'이 바로 그들의 존재 이유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 영국을 떠나 12년의 한국 생활을 포함해 계속 다른 나라에서 거주해온 내게 2019년의 영국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특별히 노년층의 모습이 그러했다. 1990년대 당시 50대였던 아버지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뉴스를 보는 것으로 소일하는 은퇴 후의 삶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아드레날린 중독자처럼 과도하게 활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산을 오르며, 마라톤과 테니스, 그리고 파트 타임으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은퇴를 고대했지만, 은퇴 후 3개월 만에 무료함을 주체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결국 다시 일터로 복귀했다.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영국의 노인들 또한 똑같은 상황이다. 연금은 먹고살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정년퇴직을 하는 나이라는 개념은 사라졌다. 사회 통념이 변하면서 노인들은 자신이 백발의 수퍼맨 혹은 원더우먼이라고 믿는 것 같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65세가 넘는 영국인 중 건설 현장에서 힘들고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인구가 8%에 달한다고 한다. 1990년대 영국의 수퍼마켓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편의점 알바생과 마찬가지로 주로 십대 후반이나 대학을 다닐 나이 정도의 젊은 층이었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70대들이 선반에 물건을 진열하거나 계산대를 지키고 있다.

최근 십 년 사이 영국에서는 육체적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70대 혹은 80대까지 일을 하고 일을 마친 후에는 20대처럼 신나게 사교를 즐기며 노년을 보내는 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의 모든 노인은 활동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 . 느긋한 여가, 고독 그리고 '은퇴'는 60대와 70대에게 이제 금기어가 되어 버렸다. 영국의 도로와 공원에는 조깅을 하거나 줌바 댄스를 배우는 혹은 플라스틱 원반을 던지며 땀을 흘리고 있는 노인들로 가득하다. '노년'이란 개념은 이제 영국인과 한국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에게 유난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10/201906100291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