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형 기자
입력 2025.01.21. 03:22
18세기 영국 풍자한 '걸리버 여행기', 종교·정치·법·과학 비꼬아 원숭이도 셰익스피어 전집 쓸 수 있다는 이론 탄생으로 이어져 원숭이와 차이 없던 AI는 9년 만에 인류 상식 바꾸는 수준 발전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 걸리버는 선의(船醫)로 취직해 세계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승선한 배마다 암초에 부딪히거나 폭풍을 만나 걸리버를 릴리퍼트(소인국)·브로브딩내그(대인국)·라퓨타(하늘을 나는 섬)·후이넘(말들의 나라) 같은 기이한 곳으로 데려간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1726년 쓴 ‘걸리버 여행기’는 풍자 문학의 시초로 꼽힌다. 장면 곳곳에 유럽의 종교·정치·철학·법 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숨어 있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다. 걸리버는 소설 3부에서 가상의 아카데미인 ‘라가도 대학술원’을 방문하는데, 기발하기만 한 아이디어가 실패를 거듭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영국 왕립학회 엘리트 과학자들이 현실 문제 해결보다 지적 허영에만 매달리는 현실을 스위프트가 비꼰 것이다. 뉴턴을 비롯해 핼리·렌·하위헌스 같은 당시 왕립학회 회원들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최소한 과학에 대해서는 스위프트가 경솔했던 것 같다.
20세기 초반 프랑스 수학자 에밀 보렐도 걸리버 여행기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소설 속 라가도 대학술원 교수들의 황당한 연구 가운데 하나를 확률로 증명하려 했다. 대학술원의 한 교수는 걸리버에게 ‘여러 단어가 배치된 기계를 학생 40명이 마구잡이로 돌리며 만들어진 문장을 합쳐서 위대한 책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보렐은 이를 발전시켜 1913년 발표한 논문에서 “수많은 원숭이에게 타자기를 치게 한다면 언젠가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과 동일한 내용을 쳐내는 확률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무한 원숭이 정리(infinite monkey theorem)’라 부르는 이론이다.
무한 원숭이 정리는 버전이 다양하다.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버전은 ‘원숭이가 언젠가 셰익스피어 희곡 전체를 칠 수 있다’는 것이다. 2003년 영국 과학자들은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 타자기를 넣는 실험을 진행했다. 한 달간 원숭이 6마리가 총 5페이지를 입력했는데, S로 가득 차 있었고 간혹 A·J·L·M이 섞여 있었다. 제대로 된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수학적으로 무한 원숭이 정리 증명은 어렵지 않다. 원숭이가 키 30개짜리 타자기로 햄릿의 유명한 독백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의 첫 두 글자 To를 제대로 칠 확률은 900(30X30)분의 1이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원숭이가 가장 좋아하는 바나나(bananas)를 쳐낼 확률만 해도 약 220억분의 1까지 낮아진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37편에 나오는 단어가 88만개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0이나 마찬가지인 확률이다. 이 때문에 무한 원숭이 정리는 무한한 기회를 가정하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지난달 호주 시드니 공대 연구팀은 ‘무한 원숭이 정리’를 부정하는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 ‘프랭클린 오픈’에 발표했다. 숫자로만 있을 뿐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정해도 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 수(10의 80제곱)만큼 원숭이와 타자기가 있어도 과학자들이 예상하는 우주의 수명(1′구골’년=10의 100제곱년) 내에 셰익스피어 전집을 칠 수 없다”고 했다.
세상을 바꾼 글 가운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 수’가 등장하는 논문이 있다. 무한을 뜻하는 ‘구골’에서 이름을 딴 구글의 자회사 딥마인드가 2016년 네이처에 발표한 인공지능(AI) 알파고 논문이다. 지난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 데미스 허사비스는 이 논문에 “바둑에서 나오는 모든 경우의 수는 10의 170제곱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 수’보다 많다”면서 “이 때문에 바둑은 AI가 정복할 수 없는 영역으로 여겨졌지만, 우리는 돌파구를 찾아냈다”고 썼다. 지금까지 무한 원숭이 정리를 비롯한 인류의 사고(思考)는 ‘원숭이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고 이해할 수 없다’처럼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 확신들 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9년 전 알파고 등장 이전 원숭이와 지적 능력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던 AI가 이제 삶을 고뇌하는 햄릿과 맥베스, 사랑에 목숨 거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쓸 수 없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두가 AI가 가져올 장밋빛 미래를 찬양하고 있지만, 실제로 AI가 바꾸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상식 자체일지도 모른다.
조너선 스위프트 |
걸리버 여행기 |
에밀 보렐 |
프랭클린 오픈 |
데미스 허사비스 |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2025/01/21/L6DF5FDUAZEO5KGIXAW4MVXUB4/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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