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박찬용의 물건만담] 남극 횡단… 아문센 시대보다 무게는 절반, 따뜻함은 두 배로

김영미의 방한의류
박찬용 칼럼니스트 입력 2025.01.22. 23:58

일러스트=이철원


내게 2025년 1월 ‘이 달의 한국인’은 산악인 김영미다. 그는 지난 18일 남극 대륙 단독 횡단에 성공했다. 1700km를 69일 8시간 31분 만에. 2023년 본인이 달성한 ‘아시아 여성 최초 남극점 무보급 단독 도달’에 이어 또 갔다. 탐험가 단 한 명이 영하 30도에 이르는 혹한에 하루도 쉬지 않고 약 24km씩 뛰다시피 걸었다. 100kg에 이르는 썰매를 끌고.

성마른 현대 한국인들은 ‘요즘 세상에 그게 내 삶에 어떤 의미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극한에 아무런 관심 없는 이들에게도 모든 탐험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많은 일상 용품이 탐험 속에서 연마된다. 김영미의 두 번째 남극 탐험 성공은 그와 함께한 장비들이 한번 더 발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 방한복의 역사가 혹한에 도전하는 인류의 역사다. 영국의 버버리는 원래 기능성 의류 전문 회사였다. 버버리의 개버딘 소재 외투는 고성능 방한 의류였다. 라이벌 탐험가였던 노르웨이의 아문센영국의 스콧은 모두 버버리를 입었다. 오리털 파카 역시 개인 경험의 산물이다. 1935년 시애틀의 아웃도어 용품 사업가 에디 바우어가 겨울에 놀러 나갔다가 저체온증으로 죽을 뻔했다. 그가 이때 경험으로 고안한 게 오늘날 개념의 오리털 파카다.

자동차 회사의 경주 대회 출전도 비슷하다. F1이나 르망24 같은 유럽의 레이스 대회는 자동차의 한계 상황에 대한 실황 실험실이다. 완전히 달라 보이는 자동차 경주와 혹한 의류에도 공통점이 있다. 온도와 싸우는 일이라는 점이다. 자동차 경주는 초고열과, 혹한 의류는 초저온과 싸운다. 그 싸움에서 생긴 데이터가 대량생산 제품에 반영돼 사람들의 삶을 개선한다.

김영미의 혹한 장비도 발전했다. 2023년 남극점 무보급 도달과 최근 남극점 횡단 당시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외투 상의의 기장은 조금 짧아졌다. 2023년 탐험 당시 착용한 다운 치마도 보이지 않는다. 더 편한 움직임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방한 의류의 모자를 감싼 털도 반쯤 줄었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미 자신이 ‘월간 산’ 인터뷰에서 말했다. 털 무게마저 줄이고 싶었다고. 모든 환경에 철저히 대비하는 준비의 산물이다. 동시에 ‘겪어 보니 아래쪽 털 반은 없어도 괜찮겠구나’라는 경험의 결과다. 이렇게 작은 세부가 모여 진보를 이룬다.

나는 김영미의 장비를 본 적이 있다. 그가 남극점 무보급 도달에 성공했을 때 일하던 잡지사에서 김영미를 섭외해 인터뷰를 했다. 남극점 도달과 함께한 장비도 촬영 용도로 미리 요청했다. 그는 특수 제작한 방한 의류를 가져왔다. 붉은색 외투는 50일쯤 입었을 텐데 등 부분 색이 바래 있었다. 백야의 땅 남극 자외선의 힘을 본 것 같았다. 김영미는 탐험 중 고통에 대해 말을 아꼈다. 빛바랜 방한 의류만으로도 그의 고통과 남극의 혹독한 환경을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인간은 물건과 함께 계속 진화한다. 모험이 끝난 뒤 김영미는 69일의 모험 동안 손에 반창고 하나 안 붙이고 멀쩡하다고 적었다. 김영미의 기술과 경험 덕분이다. 특수 장비를 제작한 김영미의 소속사 노스페이스의 역량도 풍부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한 사람이나 특정 회사의 공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혹독한 환경의 탐험이라는 도전을 해온 인류의 경험과 기술이 쌓인 것이다.

아문센 시대의 버버리 방한복과 비교하면 방한복은 혁명 수준으로 발전했다. 가볍고 따뜻하고 저렴해졌다. 2012년 영국 러프버러대학 조지 하베니스는 역사에 기록된 아문센과 스콧의 탐험 의류와 현대 방한 의류의 방한 성능을 비교했다. 아문센 시대의 방한 의류 소재는 울 기반 개버딘이나 물개 가죽이다. 오늘날 오리털이나 나일론 등에 비해 무겁고 값비쌀 수밖에 없다. 실험 결과 현대 방한 의류는 아문센 시대 방한 의류에 비해 무게 대비 2배 이상 따뜻했다.

그러니 우리가 탐험에 경의를 표해야 할 이유는 많다. 똑같은 몸을 가진 사람이 극한 도전에 성공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니.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영역에 들어가 소중한 데이터를 가져왔으니. 이 모든 요소가 인류가 진보하는 한 걸음씩의 영양소가 된다. 김영미도 한 걸음씩 걸으며 전인미답의 영역에 도달한 것처럼.

김영미
아문센
스콧
에디 바우어
조지 하베니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1/22/OTAAVVAK5BDQRNWBNFGQJ67FHY/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