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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57] 꽃집 -종수에게

문태준 시인
입력 2025.02.10. 00:07

일러스트=이철원



꽃집 -종수에게

빛이 빛에게
수분이 수분에게
가시가 가시에게
흙이 흙에게
조그마한 삽이 조그마한 삽에게
기대어 잔다

어떤 따뜻한 열기가 신발도 없이
살금살금 내려앉고,
이따금 문 위에 매달린 종이 찌르릉 소리를 내고
찬 기운을 구두코에 묻혀 들어온 사내가
잠든 장미 열 송이를 사가고
(열 송이의 잠이 부드럽게 증발하고)
달큼한 잠에 빠진 푸른 잎사귀들
깰까 말까, 따뜻하게 고민하는
길모퉁이 꽃집
밖에는 신호등이 깜빡깜빡

-박연준(1980-)

박연준


계절은 겨울이었을 것이다. 꽃집에 들어온 사내의 구두코에 찬 공기가 얼음처럼 덮여 있으니. 하지만 길모퉁이 꽃집엔 따뜻한 기운이 돌고 돈다. 꽃가게엔 환하고 밝은 빛, 뿌리를 젖게 하는 물, 줄기에 돋은 푸른 가시, 화분 속의 고운 흙, 모종삽, 꽃들이 부드러운 잠에 빠져 있다. 그리고 얼마쯤씩 있다가 가끔 문이 열리고, 문에 달아놓은 작은 종이 찌르릉 운다.

꽃집은 잠시 단잠에서 깨어나고 꽃집 주인은 물속에 잠겨 있던 꽃송이를 하나씩 꺼내 물기를 털고, 가시를 자르고, 묶어 하나의 다발로 만들어선 마치 빛의 뭉치를 건네듯이 꽃다발을 사내에게 넘겨준다. 사내는 꽃집의 달큼한 잠과 미(美)와 평화로 만든 꽃다발을 들고 꽃집을 나가고, 그러면 꽃집은 문이 닫히며 작은 종이 찌르릉 울고 멎고, 빛과 수분과 가시와 흙과 삽은 기대어 다시 잠을 즐긴다. 그렇지, 꽃집이 있었다. 어떤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던 곳. 허밍이 들려오던 곳. 다가올 봄처럼 꽃망울이 맺혀 있던 곳.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2/10/HW5QXSOBRJFJBFJZWNBUM7ZL3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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