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시인
입력 2025.02.23. 23:57
인면조의 자부심에 답함
한 잎의 풀이
한 줄의 파도가 되어
풀잎풀잎풀잎풀잎풀잎
물결쳐오면
줄기를 자르면 하얀 진액이 나오고
쓴 풀을 먹기 좋아하는
초식동물이 되어
인간을 벗기로 한다
산양이 백조를 보듯이
여우가 오로라를 보듯이
인간 이외의 눈으로
앞발을 들고
오로지 자연의 말에 귀를 열어라
지금 나의 감각은 고원의 큰 바위처럼 확실하다
산딸기의 신맛처럼 생기롭다
내가 먼 하늘에 대고
사람의 말을 흉내내면
이쪽에서 저쪽 산까지
이상한 메아리가 울려
작은 소리에도 놀란 사람들이 버섯처럼 숨는다
-신미나(1978-)
이제 봄이 오려나. 이 시를 읽으면 봄의 냄새가 난다. 봄의 기운이 파도처럼 삶의 해안으로 밀려오는 것만 같다. 풀이 돋고, 풀의 냄새가 파릇하게 서고, 풀의 쓴맛이 땅의 입안에 고이고, 봄은 대열처럼 곧 물결쳐 올 것이다. 봄의 자연이 생동할 때 우리는 쓴 풀을 뜯는 순한 초식동물처럼 봄을 살아도 좋을 테다. 눈보라 같은 헝클어진 마음을 벗어 놓고서. 작은 풀잎이 되어 싱싱하고 연한 초록의 빛깔을 마음에 산뜻하게 입고서. 돌아오고 있는, 산과 들의 봄이 되어서.
빛이 곱게 내리는 양지에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한라산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복수초가 피었다. 오랜만에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살펴보니 튤립이 오리 새끼의 주둥이처럼 생긴 조그맣고 뾰족한 움을 막 틔우고 있었다. 귀엣말로 무언가를 속삭이려고 하는 듯했다. 제주의 노지에는 네 계절 내내 풀이 있지만, 호미를 들고 채마밭에 나갈 날이 멀지 않았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2/23/ZFNIC7IUN5F5TC36PQ3SO5NDEE/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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