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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진짜 대화는 말하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입력 2025.11.05. 23:34

말 끊는 버릇은 자기 생각이 앞서거나 생각이 다른 데 있기 때문
대화란 서로 온도 맞추는 서툰 몸짓… 잘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을

대화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대화를 나누며 느껴지는 서로의 온도를 좋아한다. 같은 말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온도가 된다. ‘아, 이 사람은 내가 불편할까 봐 이렇게 돌려서 말하는구나’ ‘이 사람은 자신을 낮추면서도 나를 높여주는구나’ ‘이 사람은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구나’…. 그런 배려와 겸손과 경청이 오가는 대화는 신명이 난다.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지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대화를 나누고 나면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다. 많은 말이 오갔지만 그 무엇도 전달되지 않은 느낌. 서로의 말이 허공에서 부딪치다가 땅에 떨어진 느낌. 그런 대화가 자꾸 쌓여서 밤새 생각한 적이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차이는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말을 끊는 사람’이었다. 내 주변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말을 끊는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내 생각만 말하고 싶은 사람’이다. 마음속에 이미 자신의 답이 굳어져 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이런 대답으로 말을 끊는다. “말 끊어서 미안한데….” 둘째는 ‘생각이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이다. 눈은 나를 보지만 마음은 저 멀리 있다. 내가 한참 동안 신나게 말하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그 영화 봤어?” “그 얘기 들었어?” 셋째는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사람’이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거울처럼 반사시킨다. “네가 그런 면이 있어.”

얼마 전 친구와 대화를 하며 ‘말이 끊기는 슬픔’에 대해 한참 얘기를 했다. 내 말을 조용히 듣던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도 가끔 내 말을 끊어.”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응? 나도 말을 끊는다고?” “네가 너무 공감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아. 내가 뭔가 말하면 ‘아 맞아, 나도 그런 적 있어’ 하면서 네 이야기를 시작하잖아. 그게 나쁜 건 아닌데, 가끔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으면 좋겠어.”

놀랍게도 친구 말이 맞았다. 상대가 힘든 이야기를 하면 나도 비슷한 경험을 꺼내며 위로하려 했다. 상대가 기쁜 일을 말하면 나도 비슷한 기쁨을 꺼내며 함께 기뻐하려 했다.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어느새 대화의 중심은 내가 되어 있고, 나도 모르게 상대의 이야기를 가로채고 있었다.

더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내 주변의 ‘말끊러’ 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내 생각만 말하고 싶은 사람’은 평소에 의견을 말할 기회가 너무 없었던 사람이었다. ‘생각이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은 최근 큰 걱정거리를 안고 있었다.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사람’은 ‘나의 그런 면’을 예전부터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서툰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누구는 너무 말하고 싶어서, 누구는 너무 많은 생각에 빠져서, 누구는 너무 조심스러워서, 누구는 너무 공감하고 싶어서.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후배가 있었다. 후배는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 이야기를 한참 들려주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아 나도 그런 프로젝트 해본 적 있는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꾹 참았다. 계속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이 갈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와, 진짜?” “어떤 기분이었어?” 후배가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나서 말했다. “형, 저랑 대화 나눠줘서 고마워요.”

아, 그렇구나. 때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 좋은 대화가 될 수 있구나. 어쩌면 진짜 대화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구나. 상대의 말이 충분히 익을 때까지. 상대의 마음이 충분히 열릴 때까지. 상대의 이야기가 충분히 흘러갈 때까지.

지금도 나는 종종 누군가에게 말이 끊긴다. 혹은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말을 끊는다. 여전히 서툴다. 하지만 깨달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연결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때로는 끊어지고 어긋나지만, 연결을 향한 서툰 몸짓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대화를 나눈다. 조금 더 기다리려 애쓰면서. 가끔은 말을 끊기기도 하고, 가끔은 끊기도 하면서. 그 모든 서툼이 쌓여서 언젠가는 진짜 대화가 될 거라 믿으면서.

대화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서로의 온도를 맞춰가는 그 서툰 과정을 좋아한다. 우리는 모두 ‘평생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11/05/M4IO4KKWLNAW5CLQT7IX5KWPEU/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