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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ESSAY] 작은 시집 전문 서점 이야기

유희경 시인

유희경 시인

입력 2016.10.12 03:09


당연한 사실에서 오는 벼락에 맞은 것 같은 뒤흔들림
그 생생함을 잊지 못해 부근을 서성이며 아파하고
결국은 시인이 되어 시집을 묶고 시집 서점을 하게 된 것은 아닌가

시집만 취급하는 작은 서점을 열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라고 하자니 너무 무책임한 것 같다. 오래 생각해온 일이었으니까. 치밀하게 계산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그런 생각 한 번쯤 하지 않을까. '가게를 해보고 싶다', '가게를 하면 이러저러한 것을 해봐야지'와 같은, 당장의 고됨을 잊기 위해 하는 궁리를 나도 했었다. 시집 서점 운영에 대해 친구들과 모의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정말 시집만 있는 서점을 하고 있다. 조금 후회한다. 이왕이면 좀 더 큼지막한 꿈을 꿀 것을. 서점을 열기 전에는 편집자로 일했다. 책을 만드는 전 과정에 '참견'하는 직업이다. 솔직히 능력 있는 편은 아니었다. 주목받는 책이나 베스트셀러를 만든 적이 없으니 그리 냉정한 평가만은 아닐 것이다. 한편, 나는 시인이기도 하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그럭저럭 8년 넘게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이력만 보자면 남 부러울 것 없지만, 특별한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시인으로서도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서점 역시 별 볼 일 없는 곳이라 말하기는 싫다. 각종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도 많이 났으니 허언만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할 만큼은 장사도 되고 있다. 물론 고작 4개월밖에 안 됐기 때문에 내세울 수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추세로 연말까지 간다면 어디다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겠다 싶다. 그래서 난 요즘 제법 신이 나 있다.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만들어가는 듯싶기 때문이다. 비질을 하거나 걸레질을 할 때, 책을 서가에 순서대로 다시 꽂아놓는 그 모든 순간들. 모든 발상과 선택이 오롯이 내 책임이라는 생각에 때론 정말로 잠을 못 이루기도 하지만, 손님들이 찾아와 서점이 멋지다 감탄하고, 한 권씩 시집을 손에 들고 나서는 장면을 보면 그런 부담감 따윈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 모든 일이 시와 닮아 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단어, 문장들로 누군가의 삶에 특별함이 되어 깃드는 것이 시가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든 차마 외면하고 싶은 어두움을 폭로하든, 시는 별것 아닌 듯 찾아가 읽는 이의 삶을 흔들어놓는다. 사실 이런 생각은 우연한 계기에 찾아온 것이다. 서점을 꾸리는 일에 특별한 즐거움을 느낀 것도 그때부터였다.


서점을 열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소문을 듣고 찾아온 남자 손님이 있었다. 이런저런 시집들을 들춰보던 그는 내게 다가와 부끄러운 기색으로 시집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몇 년 전 우연히 본 시 한 구절이 도통 머리를 떠나지 않는단다. 급히 지나친 바람에 시집 제목은커녕, 시인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고, 기억이 나는 것은 '당신을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이 내 오른편에서 뛰더라'와 비슷한 문장이랬다. 나는 그 시와 그 시가 담긴 시집을 알고 있었다. 함민복의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 수록된 '선천성 그리움'이다. 그 구절을 정확히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하략). 그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나는 그가 떠난 뒤에도 한참, '이 시의 어떤 점이 그토록 찾게 하고 또 저토록 기쁘게 만들었을까' 궁금해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안으면 심장끼리 맞닿을 수 없다. 시인은 그 닿을 수 없음을 '선천성 그리움'이라 명명했다. 사람이란 애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게 당연하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이겠다. 불현듯,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도 그랬다는 것이 떠올랐다. 당연한 사실에서 오는 벼락에 맞은 것 같은 뒤흔들림. 그 생생함을 잊지 못해 시 부근을 서성이며, 쓰고 아파하고 결국은 시인이 되어 시집을 묶고 또 이렇게 시집 서점을 하고 있게 된 것은 아닌가.

 

유희경 시인의 서점 '위트앤시니컬', 함민복 &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요즘 내가 신이 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한 번 더 쓸고 닦고 책장을 정리하며 손님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찾아올 '그이'를 기다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삶을 더 생생하게 만들 수 있는 활력을 건네는 시를 주고받는 현장에 서 있다는 것이 좋고 기쁘다. 가능하면 오래 이 일을 해보고 싶다. 기왕이면 아주 잘해봐야겠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0/11/201610110381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