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논설위원
입력 2025.02.19. 20:47 업데이트 2025.02.20. 15:05
히틀러가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했다. 불가침 조약을 믿었던 소련군은 개전 초에만 300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격노한 스탈린이 그해 8월 ‘명령 270호’를 내렸다. “항복한 자는 즉결 처분하고 가족도 체포한다”는 내용이다. 그러자 1942년 독일군에 붙잡힌 소련군 장군이 포로들로 스탈린 타도를 위한 ‘러시아 해방군’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판사판이 된 것이다. 의심이 병적이던 스탈린은 포로가 된 소련군을 반역자, 간첩으로 간주했다. 자기 장남이 포로가 됐는데도 교환 협상을 거부해 죽게 만들었다. 1930년대 독재를 위해 자국민 100만명을 간첩 등으로 몰아 학살했던 사람이다. 2차 대전 후 소련군 포로 중에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송환 열차에서 자살하거나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일제 관동군이 1939년 몽골 인근 노몬한에서 소련군과 전면전을 벌였다. 일본군이 거의 전멸했는데 수백 명은 포로가 됐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는 항복과 후퇴를 최대의 수치라고 세뇌하고 있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어렵게 살아 돌아온 포로를 탈영병, 탈주범과 같이 취급했다. 장교에겐 자살을 강요하기도 했다. 생존 포로는 나중에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총알이었다”고 했다.
▶6·25 때 중공군 포로는 2만2000여 명이다. 이 중 1만4000여 명이 대만행을 선택하고 8000여 명이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으로 돌아간 포로들은 “왜 살아서 왔느냐”는 질책과 함께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중 공산당원 2900여 명의 92%는 ‘해당(害黨)' 혐의자로 찍혀 당적을 빼앗겼다. 문화대혁명 시절 ‘배신자’ 간판을 목에 걸고 조리돌림당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포로 때가 더 좋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들은 개혁·개방 이후 명예 회복에 나섰지만 문혁 때 자료가 없어져 ‘배신자’란 주홍글씨를 끝내 지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스탈린 독재, 일본 군국주의, 중공 전체주의가 포로를 변절로 보는 것은 사람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소용을 잃은 수단은 폐기된다. 2차 대전 때 미국·영국 등 연합군 포로는 나중에 자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우크라이나군에 붙잡힌 북한군 병사는 전투 중 턱과 팔에 큰 부상을 입고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됐다. 그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인민군에서 포로는 변절이나 같다”고 했다. “수류탄이 있었으면 자폭했을지도 모르는데”라고 했다. 사람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보는 정도를 따지면 북한 김씨 왕국이 첫째일 것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02/19/WC5EONFEEFAG3MNOYROC6UH35I/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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