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5.02.19. 23:56
얼마 전 오래 알고 지내는 분으로부터 생소한 말을 들었다. 더 늦기 전에 간병비 보험을 들라는 말이었다. 참고로 지인은 보험업 종사자가 아니다. 노쇠해져서 자식들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아버지를 형제들과 함께 돌보고 있다. 경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지인의 아버지는 통장의 돈을 찾아와 이 돈으로 자기를 보살피라고 했다. 병원에 입원했던 지인의 아버지는 의료진에 대한 불신으로 모두를 난처하게 하다 결국 자녀의 집에서 돌봄을 받게 되었다. 요양등급도 신청해서 요양보호사도 집으로 온다. 아버지의 돈, 자녀들의 돈, 국가에서 받는 혜택에도 불구하고 점점 버겁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편인 지인의 그 말은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나는 간병비 보험을 들지 않았다. 지인이 내게 권한 간병비 보험은 두 종류였다. 부모를 위한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것. 일단 부모에 대한 보험을 들려면 부모와 형제들과 의논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위한 간병비 보험에 대해서는 무척 회의적이다. 내가 정작 간병비 보험의 수혜를 받아야 할 시기에 나의 지력과 체력 모두가 온전해서 제대로 신청하리라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노년의 나는 아마도 혼자 남겨질 가능성이 크고 대신해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2022년에 나온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를 보면 노년에 제도적 혜택을 받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대구에 혼자 사는 85세의 꼿꼿한 말임씨는 외아들이 온다고 해서 청소를 하려다 계단에서 넘어진다. 보험공단 직원이 집으로 방문해서 장기요양보험의 등급을 받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 말임씨가 너무 멀쩡한 것이다. 지인의 아버지도 그랬다.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는 자신이 ‘등급’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직원이 오면 불굴의 의지력을 발휘, 아무 문제가 없는 건강한 사람 연기를 했다.
요즘 부쩍 노년과 노년의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그렇다. 돌봄이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돌봄이 쉽지 않은 사례를 점점 많이 접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래보다 나보다 십 년 이상의 연장자에게 노년과 노년의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몇 집 건너 한 집꼴로 이런 문제를 안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부모는 점점 늙어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유교적 덕목으로서의 ‘효(孝)’를 권장하며 모든 돌봄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게 국가적 압박을 가하던 시대를 지나, ‘요양원에서는 죽기 싫다’라고 말하지만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게 죽음의 수순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어제보다 오늘 더, 내일은 더, 삶보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의 미래인 노인의 처지와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일이 늘어간다. 나보다 윗세대인 분들은 말한다. 자기는 이렇게 부모를 돌보고 있지만 자식으로부터 돌봄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나를 책임지는 것은 나일 수밖에 없다고. 결국 어떻게 늙다가 죽을 것인가로 이야기는 귀결된다. 그러다 이야기는 ‘노년에 남으로부터 돌봄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누워 있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간병비 보험이 팔리는 것이다.
그러다 이런 말을 봤다. “이담에 늙어보시라. 왜 내가 그랬는지 생각날 것이오.” 내가 본 늙음에 대한 가장 호소력 있는 말이었다. ‘늙는다는 건 어떠어떠한 일이다’라고 단정하지 않고 저절로 공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늙는데, 아직은 늙지 않아서 늙음에 대해 알 수 없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만 죽음에 대해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 “너네는 늙어봤냐? 우리는 젊어봤다”라는 말은 얼마나 경망스러운가. 대화를 단절시키는 이 말과 달리 ‘이담에 늙어보시라’라는 말은 여러 의미가 담긴 데다 묵직해서 늙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인생에 대한 모든 상념을 모은 듯한 몽테뉴의 ‘에세’에는 정작 ‘늙음에 관하여’는 없다. ‘홀로 있음에 관하여’와 ‘나이에 관하여’는 있지만 말이다. 중세 시대만 해도 늙어 죽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적 관점에서 축복받은 자인 우리는 ‘어떻게 늙어 죽을 것인가’라는 ‘현대병’을 앓고 있다. 몽테뉴가 인용한 키케로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본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임씨를 부탁해 ![]() |
몽테뉴 ![]() |
에세 ![]() |
키케로 ![]() |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2/19/UXM4PTXLJFA6HPTXQZLHT7PEKA/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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