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입력 2025.02.21. 00:02
3년 전 겨울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윤석열 캠프의 한 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새 정부에 어울릴 슬로건을 하나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하다 마침 좋은 문구가 떠올라 다시 전화를 했다. “‘다시 대한민국’ 어때요? 시민 참여를 이끌고 싶으면 ‘다시 ㅁㅁㅁㅁ 대한민국’ 이렇게 열어놓고, 빈칸을 공모하는 것도 생각해보세요.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다시 자유로운 대한민국’... 이런 식으로요.” 그 인사는 “좋은데요” 한마디하고 전화를 끊었다.
계절이 바뀌어 봄에 열린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장에 ‘다시 대한민국’이 슬로건으로 걸린 걸 보았다. 여러 아이디어 중 내 의견이 채택된 것이 반가웠고, 어쨌든 새 정부의 비전이 튼튼한 국가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을 옹호하던 문재인 정부와는 확실히 차별되는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대통령 취임사를 들으며 새 정부의 출범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자유 대한민국이라면 있어서는 안 될 대통령의 비상계엄 이후 나라가 극심한 분열로 치닫는 와중에 내 눈을 붙든 사건은 따로 있었다. 대통령 취임 슬로건이 더불어민주당 슬로건으로 슬며시 옮아간 사건이다. ‘회복과 성장’이라는 부제에, ‘다시 大한민국’으로, ‘대’ 자만 한자로 바뀐 슬로건이 이재명 대표의 교섭단체 연설 때 ‘잘사니즘’이라는 또 다른 문구와 함께 스크린에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그 연설에서 이 대표는 ‘성장’을 29번이나 말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눈과 귀를 의심했다가, 이해해 보려고도 했으나,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음만 복잡해졌다.
흑묘백묘론을 들고나온 실용주의 노선이라면 정책 어젠다가 걸맞지 철학과 방향이 담긴 슬로건은 어울리지 않는다. 중도층을 겨냥한 우 클릭 제스처라고 하기에도 뭔가 심하게 창의력 부족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말 만들기와 틀 짓기에 관한 한, 민주당 쪽에는 발군의 달인들이 차고 넘친다. 그들이라면 훨씬 신박한 문구를 창작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상대편 슬로건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대체 왜?
굳이 애써 이해하려 해보자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 정치 슬로건도 시대에 따라 재사용될 수는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선거에 내건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는 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이 쓴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재현한 것이고, “America First” 역시 1916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내세우며 만든 말이다. “Stop the Steal”이라는 슬로건으로 2020년 자신이 패배한 선거를 공격한 트럼프는 지난해 자신의 형사재판에서도 똑같은 슬로건을 반복해 사용했다.
그러나 정치 메시지의 핵심은 일관성과 반복이고, 메시지 관리 차원에서 슬로건은 바꾸지 않는 게 상식이다. 트럼프는 첫 임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MAGA를 동일한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레이건이 썼다고 하지만 이미 세상을 떴고, 공화당 출신의 성공한 대통령이니,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의 새 슬로건 ‘다시 大한민국’은 임기 내내 척을 지던 상대 당 소속 대통령의 취임 슬로건이고, 의회가 탄핵한 대통령이 쓰다 만 슬로건이다. 게다가 최근 조사에 따르면 “상대 당이 역겹다”고 답한 응답자가 민주당은 69%, 국민의힘은 58.8%에 달할 정도로(동아시아 연구원 조사) 정치 양극화가 심하다. 그렇게 역겹고 싫고, 심지어 헌재에서 탄핵심판 중인 상대의 가치와 철학이 담긴 슬로건을 가져다 쓰고 싶을까.
해답의 실마리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극우’라는 좌표에 앉히고, 그 언저리를 모두 ‘내란 동조’ 세력으로 틀 짓기 하며, 탄핵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호헌 세력이 되어달라”고 호통치는 야당의 레토릭에 있다. 당대표의 사법 리스크와 주변 인물들의 거친 언사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그들이 그리는 그림은 훨씬 크고 비전은 원대하다. 대통령의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되면, 계엄이건 계몽이건 대통령이 한 행위는 헌법이 인정한 불법 선동 행위로 역사가 기록한다.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려 했던 윤석열 대통령은 졸지에 스스로 ‘반국가 세력’이 되고, 척결 대상이었던 ‘반국가 세력’이 재빨리 ‘대한민국’의 빈곳을 메꾸는 것이다. 일찍이 박정희 대통령이 내세웠던 ‘잘살아보세’를 ‘잘사니즘’이라는 슬로건으로 바꿔, 우파의 역사와 과실까지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는, 소위 ‘우파 궤멸’의 기회의 창이 열렸다고 그들은 판단한 것이다.
야당이 가져간 건, 슬로건이 아니라, 거기 딸린 대한민국의 명분과 가치, 우파의 척추와 심장이었다. 탄핵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극우라는 바윗돌을 달아 대한민국이라는 절벽에서 떨어뜨리면, 그들은 중원보다 더 넓은 나라 전체를 얻을 수 있다. 야당의 우 클릭이 중도를 얻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분석은 그들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도 그리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2030 청년이 모조리 극우가 될 리 만무하고, 탄핵에 찬성한다고 해서 야당을 지지하는 것도 아닌, 대한민국 주의자들의 숫자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레토릭의 세계에서 지금 대한민국은 야당 쪽으로 넘어가 있고, ‘헌법’을 재판한다는 곳 또한 대통령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자신이 벌인 일이 대한민국에 가져올지도 모를 가공할 결과를, 지금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2/21/FAYJITFYABCR7PJRBV2NPUVEL4/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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