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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犬체공학 가슴줄, 개소파 50만원...“개같이 벌어 개한테 쓴다”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4.03.26. 03:00 업데이트 2024.03.26. 07:48

최근 찾은 애견용품 박람회, 축구장보다 훨씬 큰 전시장에 ‘人山犬海’
犬체공학적 가슴줄, 50만원짜리 개소파… 유모차보다 개모차가 더 팔려
저출생 시대, 개같이 벌어봐야 줄 사람도 없다는 말이 우스개 아니더라

일러스트=이철원


얼마 전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애견용품 박람회에 갔더니 입구에 이렇게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개같이 벌어 개한테 쓴다.” 처음에는 우습게만 여겼는데 곱씹을수록 그럴듯한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돈 버는 일은 점점 더 힘들고 개 키우는 사람은 줄곧 늘어나고 있다.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으니 개 먹이고 치장하는 게 낙이다. 나는 설령 개같이 벌더라도 그 돈을 개한테 쏟아부을 생각이 없지만 어쨌든 그 플래카드 밑을 지나 내돈내산, 아니 ‘개벌개쓴’의 세계로 입장했다.

말 그대로 인산견해(人山犬海), 사람 반 개 반이었다. 축구장 한 개 반 크기인 3400여 평 전시장에 개 용품 판매점들이 가득 들어찼고 개를 끌거나 안거나 이른바 개모차에 태운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통로를 따라 움직이려면 퇴근 시간 지하철역 플랫폼에서처럼 어깨가 부딪혔다. 개모차가 없는 나는 우리 개가 사람들 발에 밟힐까봐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남의 개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개보험 판매점을 필두로 개옷과 개밥, 개목줄, 개모차, 개집, 개장난감, 개샴푸, 배변패드와 똥봉투까지 개와 관련된 상품들이 무궁무진했다. 한의대에서 녹용과 침향으로 만들었다는 개보약도 있었고 애견신문사도 부스 한 곳을 차지했다. 개 화장실도 따로 마련돼 있었는데 사람 화장실은 전시장 밖에 있었다.

작은 토끼만 한 개부터 망아지만 한 개까지, 돌아다니는 개들도 다종다양했다. 개들은 다른 개들의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었고 모두들 신이 나서 꼬리를 치켜들고 달달 흔들었다. 개 견(犬) 자에 괜히 점이 찍힌 게 아니다.

특히 작은 개들은 다들 메이크업이라도 받고 온 것 같았다. 머리통을 공 모양으로 깎은 놈, 리본을 묶거나 염색을 한 놈, 긴 털을 스트레이트펌이라도 한 듯 곱게 늘어뜨린 놈들이 즐비했다. 개버리를 어디서 얼마에 샀네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힐끗 보니 개가 버버리 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 개는 낼모레 입대하는 놈처럼 털을 바짝 깎고(개털 깎는 비용은 짧을수록 싸다) 헐벗은 몸에 덜렁 가슴줄만 찬 기초생활수급견이었다.

사실 이날 우리 개의 낡은 가슴줄을 바꿔줄 생각이었다. ‘하니스(harness)’라고 부르는 가슴줄은 목 대신 개 몸통에 둘러 개줄을 묶을 수 있는 장비다. 눈에 확 띄는 가슴줄이 있어 가격표를 보니 10만원이 넘었다. 이탈리아산으로 아주 가볍고 ‘견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됐다고 했다. 몇 군데 돌아다니다 결국 튼튼하고 채우기 쉬운 국산 가슴줄을 장만했다. 그 역시 5만원에 육박했다. 사실 5만원짜리 가슴줄은 비싼 축에 끼지도 못한다. ‘개모차계의 에르메스’라는 일제 개모차는 20% 할인을 받아도 100만원이 넘었고 개가구 전문점에서는 50만원쯤 하는 개소파를 팔고 있었다.

세계 최악의 저출생 국가인 한국에서 개 키우는 인구는 크게 늘고 있다. 작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조사해 보니 반려동물 양육 인구는 전체 인구의 28.2%였다. 이 조사를 처음 한 2010년(17.4%)보다 약 62% 증가했다. 반려동물의 75.6%가 개였다. 작년 한 온라인 쇼핑몰에선 개모차가 유모차보다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3년 전만 해도 개모차 33%, 유모차 67%였는데 작년엔 57% 대 43%로 역전됐다.

출생률이 떨어지면서 반려동물이 느는 건 외국도 마찬가지다. 작년 합계 출생률이 1.0으로 내려간 중국은 2018년 이미 반려동물 수가 2억 마리를 넘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대만에서는 반려동물 수가 15세 이하 아이들 수보다 더 많다고 한다.

애견용품 박람회에 온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여자가 많았다. 여자끼리 또는 여자 혼자가 절반 넘는 것 같았고 부부 또는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그다음으로 많았다. 남자 혼자 온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지난달 영국 BBC는 한국 여성들을 심층 취재해 ‘아이 낳지 않는 이유’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경력 단절, 독박 육아, 높은 노동 강도, 비싼 집값과 사교육비 등이 이유로 꼽혔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결혼과 출산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설파한다. 그걸 포기하는 세태를 못마땅해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가 외로움이 좋아서 혼자 살고 아이가 싫어 낳지 않는 게 아니다. 죽어라 일해도 삶이 나아지리란 희망이 없으니 자신이 없고 두려운 것이다. 개같이 벌어봐야 쓸 대상도, 물려줄 사람도 없다. 개같이 벌어 개한테 쓴다는 말이 우스개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03/26/DYSUXS6S2NDMLLFWJTTNRR5Z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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