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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판교 사투리

강경희 기자
입력 2025.01.19. 20:31 업데이트 2025.01.19. 23:57

일러스트=이철원


“물 먹어라”는 말은 건강을 챙겨주는 덕담이지만 기자들한테는 악담이다. 언론계에서 “물 먹는다”는 건 경쟁사한테 특종을 뺏기거나 꼭 써야 하는 기사를 놓친 걸 뜻한다. 기자들 사이에서 “영어는 환영, 일본어는 사절”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풀(pool), 엠바고(embargo)는 낙종 염려 없이 편하게 취재해서 보도하는 방식이고, 초년 기자 시절에는 일본어 표현이 유독 많이 쓰였다. ‘나와바리’(なわ-ばり,관할 지역)에서 ‘마와리’(まわり,돌면서 취재)하며 기사 작성했는데 선배한테 “대체 이 기사 ‘야마’(やま,핵심 주제)가 뭐냐”고 혼나기 일쑤였다.

직업별로 통용되는 은어는 해당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의사소통을 위해 생겨난 일종의 언어적 약속이다. 가령 병원에서 긴급 공지하는 ‘코드 블루’(blue code,심정지 환자 발생), ‘코드 레드’(code red,화재 발생) 같은 의료 코드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없이 상황의 심각성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알린다. 이런 용어는 일반인에게는 외국어만큼이나 알아듣기 어려운 장벽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직업별 은어도 시대상을 반영한다. 오래된 업종일수록 일본어에서 넘어온 말이 많은 반면, 신생 업종에는 영어를 섞은 단어가 더 흔하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급성장한 배달업계는 요즘 “신년부터 역대급 콜사” “미션 낚시냐”고 푸념한다. 콜(call)은 배달 주문이고, 콜사는 콜 사망, 즉 배달 주문이 없는 상태다. 미션은 배달업체가 라이더들에게 특정 목표를 달성하면 추가 보상을 해주는 제도다. 라이더들이 체감하는 불황이 그들만의 은어로 간결하게 소통된다.

▶”작업 마치면 핑(ping·연락) 주세요” “해당 이슈(issue·문제)는 로컴(low communication·소극적 대응)으로 갑시다” “그 일은 아삽(ASAP·As Soon As Possible·가능한 한 빨리) 팔로업(follow-up·후속 조치)해줘.” IT 기업이 몰린 경기도 판교에서 업계 종사자들이 나누는 대화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판교 사투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판교 IT 기업에 취업하려고 취업 준비생들이 이 ‘판교 사투리’까지 미리 익힌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언어 지문’을 남긴다(제임스 페니베이커 텍사스대 교수).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마치 자신의 손가락 지문처럼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정체성이나 배경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취업을 위해 영어, 중국어 같은 외국어뿐 아니라 판교 사투리 같은 ‘직업 언어’까지 익혀야 한다니 요즘의 취업난을 보여주는 듯하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01/19/S734DMJQIZA6HCKLI5GV4PNGQ4/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